계양구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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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올해의 책

성인・청소년 분야

  • 구립도서관
  • 2023-04-22


[출판사 서평]

버거운 덴 각자의 이유가 있지만
마음이 가붓해지는 방법은 어쩌면 단 하나

학기 초 자기소개서를 쓰는 시간. 서유리는 텅 빈 종이를 마주하고 잠시 생각한다. 무슨 말을 어디까지 적어야 하는 걸까. 어째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지? 할아버지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건 왜인지? 늘 그래 왔듯 유리는 적지 않는다. 자신을 입양한 사람과 낳은 사람의 행방을 모두 알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가정사는 감추면 그만이고, 유리에게 감추는 일은 너무도 익숙하다. 어느 지점에서 입술을 얇게 다물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화제를 바꿔야 할지를 자연스레 터득한 지 오래다. 그러나 움찔거리는 수치심, 원망, 분노 같은 것들은 꾹꾹 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아서 유리는 거듭 되뇐다. 딱 2년만 더. 스무 살이 되면 이 집을 훌훌 털고 떠나자. 징글징글한 과거는 모두 없던 일로 치워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을 거야. 유리는 대학 진학을 빌미로 오롯이 혼자 살 생각이었다. 연우를 만나기 전까지는.
시작은 엄마 서정희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자신을 입양했다가 버린 사람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을 치르고,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 연우와 함께 살게 되면서, 유리는 외면해 왔던 감정의 덩어리들이 세차게 달려드는 것을 느낀다. 개중엔 이제껏 한 번도 지녀 본 적 없는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연우를 향한 애틋함이 슬며시 피어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거리를 두고 남남처럼 지내 온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 내내 미워하기만 했던 엄마를 애잔하게 여기는 마음이 유리의 일상에 번져 간다. 스스로의 변화를 마주하는 건 유리만이 아니다. 어쩌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뿐이라는 듯 외따로 살아가던 연우와 할아버지 또한 조심스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두껍게 세워 두었던 마음의 벽에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도 모르는 새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게 되었음을. 때로는 치솟는 화를 쏟아내는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기도 하면서, 세 사람은 조금씩 서로에게 당연한 존재가 되어 간다.
『훌훌』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사연으로 버거운 짐을 떠안고 있다. 소문에 시달리며 교실의 악의와 폭력을 마주하는 고향숙 선생님도, 유리의 곁을 든든히 지키는 미희도, 유리와 비슷한 듯 다른 처지의 세윤도 쉬이 헤아릴 수 없는 저마다의 속사정을 지녔다. 제 몫의 아픔을 고요히 감당하던 그들이 단절의 영역에서 연결의 영역으로 더디지만 분명히 나아갈 때 이야기는 뭉근한 온기를 띠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는 무게는 어느 정도인지, 그 무게에 기대고 의지하는 관계도 있을 수 있는지, 어쩌면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맞닥뜨리며 함께 만들어 가는 관계는 그 자체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닌지. 질문들을 던지며 결국 『훌훌』은 말하는 듯하다. 버거운 덴 각자의 이유가 있을지라도, 가뿐해지는 방법은 하나뿐일지 모른다고. 마음과 마음은 연결될수록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서로의 온기를 쬘 만큼은 거리를 좁혀도 괜찮다고.